‘좋은 시는 말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저의 시조에는 고향인 남부여의 사비성 너른 들판을 끼고 사신 어머니가 자주 등장합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어머니의 터를 잡고, 어머니의 새로운 날을 살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내게 남겨진 모든 날은 그리움을 입고 삽니다. 어머니의 체취와 모습이 느껴지는 옷을 입고, 내 모습에서 어머니 얼굴을 보며 삽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글감이 주로 어머니가 됩니다.
어쩌면 고향 부여를 떠나 서울 유학을 시작한 여고 시절이 그 첫 번째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찍 젖을 뗀 아이처럼 엄마 없이 살아야 했던 그 시간이 보고픔과 그리움으로 채워졌고 그 허전함이 만든 마음은 시가 되고 수필이 된 것은 아닐까 싶어집니다.
엄마의 부재를 채우기 위해 시작된 독서, 그것이 두 번째 원인입니다. 텅 빈 방에서 엄마를 생각하지 않고도 견딜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 한 권의 책은 엄마였고,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상쇄시킬 수 있는 훌륭한 존재가 되어 내 머리와 가슴을 채워나갔습니다. 시와 소설, 수필 등을 통해 시인에 대한 열망과 작가에 대한 꿈이 자랐습니다. 등단작인 ‘보리수’ 역시 마당에서 등목해주시던 엄마의 부드러운 손길에 느낀 따스해진 마음을 표현했고, 그것이 시인의 문을 열어주었기에 시인이 될 소재도, 주제도 내게는 언제나 어머니였습니다.
현대시조 100인선 중 『늦은 편지』에 실린 ‘보리수’,‘신발 한 켤레’, ‘앉은뱅이 꽃’, ‘기다린다는 것’,‘순둥이’ 등 40여 편의 작품이 어머니와 고향 부여입니다. 시가 된 어머니와 시가 된 고향은 저와는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지금도 나를 들뜨게 합니다.
노환으로 다리가 아파 걷는 것을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며,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긴 백제의 26대 ‘성왕’이 떠오릅니다. 백제의 부활을 꿈꾸며 천도를 단행했던 성왕의 심경처럼, 다리가 아파 더는 오르지 못하는 말랭이 언덕의 우리 집을 비우고 이사를 했던 일은 성왕의 심경만큼 내 가슴도 떨리듯 아팠습니다. 그러나 이사 후 조금 더 좋은 집에서 어머니가 조금 더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 성왕이 알면 깜짝 놀랄 비유지만, 내 마음도 그랬습니다.
저녁 식사 후 고란사를 향해 넓은 둑을 지나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걷던 일, 백마강 달밤이라는 노래는 음정 박자, 가사까지 무시하면서도 어머니와 나만의 노래를 만들어냈던 유쾌한 시간입니다. 황포돛대 떠다니는 한가로운 저녁 무렵, 모녀의 시간은 그렇게 언제나 꿈처럼 살아납니다.
늦은 편지 역시, 어머니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손편지로 등록금을 달라던 내가 휴대폰 문자로 안부를 물으니, 어머니는 그것은 편지가 아니라며 손편지가 보고싶다하셨습니다. 어머니를 위하는 일이 알고 보니 모두 나를 위한 일이 되어버린 지금, 이렇게 떠올린다는 것만으로도 그리움이 물결칩니다. 특히 앉은뱅이 꽃은 읽는 순간, 눈물이 맺힙니다.
기울어진 모퉁이에 노랗게 숨어서 핀
어머니는 나 닮았다, 주저앉아 말씀한다
걸어선 갈 수가 없어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
(앉은뱅이 꽃 전문)
소를 키워 송아지를 낳으면 대학 등록금 때문에 내다 판 후 특수작물인 수박 농사로 노년이 깊어갈수록 다리를 잘 펴지 못하셨습니다. 불편한 두 다리의 고통으로 4남매가 자랐습니다. 어머니의 허리는 굽어졌지만, 수박은 싱그럽고 달콤하게 쑥쑥 자랐습니다. 집 안의 대들보 같은 소 한 마리처럼, 아낌없이 다 주고도 아쉬워했던 소 같은 우리 어머니. 구멍 뚫린 무릎을 위해 사골을 고아가며 울음 울었던 시간이 시가 되고, 시의 주제가 되어 살아납니다.
명예와 상 타기 등 욕심 많은 딸이라며 늘 걱정하시던 어머니가 “적덕을 베풀어라” 그 한 마디가 불현듯 떠오릅니다. 덕을 쌓은 후에 절로 찾아오는 명예가 진짜 명예이며 그래야 상다운 상을 받아도 부끄럽지 않다고 말씀하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90세가 되던 어느 봄날, 나비를 찾아 떠난 소녀처럼 곤한 잠에 빠진 채 소풍 나온 이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를 기억하며, 작품 ‘통점’을 통해 깊은 뜻을 다시 한 번 새깁니다.
어미 곰은 새끼에게 사는 방법 가르치려
산딸기에 정신 팔린 아기곰 두고 오는데
울 엄마 평생 날 끼고 이날까지 살아왔다
무뎌진 엄마 발이 내 눈에 비를 쏟는다
발바닥 굳은살에 발톱 다 뭉개지도록
괜찮다, 절룩거리며 지팡이를 찾는다
편할 때 잊었다가 힘들면 찾아가는
속된 자식이라 그늘진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본다 이마가 쩌릿하다
꽃피기 좋아하는 매화꽃 딸 때문에
희망의 등고선을 해마다 그려 넣고
한세월 미세먼지를 마음결로 닦는 엄마
(통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