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생활 13년. 나름대로 잘 쌓은 커리어였다. 2년 전, 꿈 꿔온 회사로 이직에 성공했을 때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내 커리어도 육아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땐 육아휴직이 끝나고 막 복귀한 터라 워킹맘의 삶에 대한 자각이 부족했다. 돌이 지난 아기를 오후 5시까지 어린이집에 맡겨야 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염려하는 양가 부모님에게도 별일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했다.
“병아리반 가면 애기들 다 그 시간까지 남아있어요. 어쩔 수 없지, 맞벌이가 대세니까. 요즘 아기들은 다 이렇게 크니까 이상한 일도 아니에요.”
하지만 아이는 6개월이 지나도록 어린이집에 적응하지 못했다. 매일 아침 등원 거부는 기본이고, 밤에는 내일은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며 울었다. 아이는 금요일 저녁에는 잠시 기분이 좋았다가 일요일 해질녘이 되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곤 했다. 그 작은 눈동자에서 마치 직장인의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지자 나는 더 이상 종일반에 보낼 자신이 없어졌다.
결국 할머니들의 시간이 되었다.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교대로 아이를 3시쯤 하원 시켜 주기로 했다. 아이는 일찍 하원하게 되어 기뻐했지만 집에 와도 엄마는 없었다. 하필 나는 바뀐 회사에서 중요한 일을 맡게 되어 바쁜 시기였다. 아이는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아빠를 좋아하고 잘 따르면서도 항상 엄마를 원했다. 퇴근 후 놀아달라고 달려오는 아이를 보면 가슴이 간지러울 만큼 사랑스러우면서도 내 삶이 너무 고달프게 느껴졌다.
아이는 하루 종일 기다린 만큼 오래 놀고 싶어서 잠을 안 자려고 했다. 더 놀아줘야 하는데 일은 계속 늘어나니 잠을 줄여야 했다. 밤 10시쯤 아이를 재우며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잔업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새벽달이 지고 동이 트는데, 내일 회의가 있는데, 아직도 보고서를 다 쓰지 못했는데.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현관문을 나서면서 자신에게 물었다. 몇 살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아니, 몇 살까지 할 수 있을까.
일과 육아. 기다란 막대기의 양 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심을 잘 잡고 걸어갈 것이다. 막대기가 흔들리더라도 놓치지는 않으리라. 자신만만하던 그때는 몰랐다. 그 막대기가 한없이 길어지고 무거워질 수 있다는 것을. 걷기는커녕 그 밑에 깔려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여름에 걸린 감기가 일 년이 되도록 낫지 않았다. 축농증으로 항생제를 바꿔가며 먹은 지도 반년이 넘었다. 내과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폐가 하얗게 보였다.
“폐렴이네요. 30대에 폐렴은 흔치 않은데.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래요.”
염증수치가 떨어지려면 푹 쉬어야 한다지만 중요한 프로젝트 중이었다. 팀장은 재택근무를 하겠냐고 물었다.
“죄송합니다…. 저 못하겠어요.”
그날 남편에게 1년간 육아휴직을 하겠다고 했다. 사실 재택근무를 하는 남편은 그동안 육아를 더 많이 도맡고 있었다. 나는 아프고, 아이는 외로웠고, 남편 역시 과로로 지쳐가고 있었다. 남편은 흔쾌히 동의하면서 기왕이면 네가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해보라고 해주었다.
원래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5살 때부터 25살까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회사원이 되었을까. 자유롭게 글을 쓰려면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구속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우습게도 나는 입사한 후로 글을 전혀 쓰지 않았다. 꿈이 소중한 보물이라면, 나는 보물 상자를 파묻어 놓고는 그 땅에 외양간을 지어 소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13년 동안이나. (물론 소를 키우는 것도 좋은 일이었으나)
늘 불안했던 20대. 대학로 호프집에서 친구들과 한잔 하고 나면 외롭고 허전한 기분에 2차를 가자고 붙잡곤 했다. 겨우 막차를 잡아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 냉정한 세상에서 불안정하고 한계 많은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따위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떠오른 단상들을 품고 집으로 돌아와 새벽까지 작정 없이 글을 갈겨썼다. 내 술 냄새에 스스로 질려서 창문을 열면, 동트기 전의 푸른 하늘이 보이고 차가운 새벽 공기가 훅 들어오곤 했다. “청춘아, 청춘아. 정신 차리거라.”라는 듯이.
이제 와 돌아보니 그 시간이 나를 살렸다. 시간과 열정만 넘치던, 바로 그것이 가장 값진 줄도 모르고 사치하던 청춘에게는 글 쓰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고요했다. 감정을 걸러 생각의 거름으로 만드는 시간. 길고 어두운 밤을 밝히던 나의 새벽이여.
갑자기 일출이 보고 싶어 남편에게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다. 하루 만에 숙소를 예약하고 강원도로 떠났다. 황금연휴라더니 길이 밀려 5시간이나 걸린다고 한다. 바다를 보러 간다고 신이 났던 아이는 기다리다 지쳐서 잠들었다. 강원도에는 산도 많고 터널도 많다. 긴 터널 속에서 정체되자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남편에게 속풀이를 하게 된다.
“여보 있잖아, 나는 육아휴직을 하고 요즘 행복해. 내 건강도 좋아졌고, 아이도 정서적으로 편안해 보여. 그런데 이 행복이 끝날까 걱정돼. 솔직히 복직하고 싶지 않은데, 돈을 생각하면 그래도 해야 하잖아. 당신은 나에게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했지만, 글쓰기로 돈을 버는 사람이 뭐 얼마나 되겠어. 퇴사를 하고 나서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그땐 정말 후회할 거야.”
남편은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이 무언의 동의라고 간주했다. 실망감과 함께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래도 괜찮으니 그만두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현실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내가 리아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남편의 목소리가 터널 속의 정적을 깼다.
“우리는 두 가지 길을 보여줄 거야.”
남편은 잠든 아이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만일 리아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고 하면, 나를 보면 돼. 직장 다니면서 일을 통해서 성취감도 느껴보고, 돈 모아서 취미생활도 하고. 안정감 속에서 행복을 찾으면서 살겠지.”
“그런데 만일 리아가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런데 그게 성공 확률이 낮아서 남들이 말리는 길이라면. 그때는 너를 보고 용기를 얻는 거야. 엄마는 원래 평생 재미없는 일만 하다가 죽을 줄 알았는데, 회사 그만두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저렇게 잘 살고 있다고. 그러니까 리아도 잘 해낼 거라고 말해줄 수 거야.”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면 돼. 나는 아이에게 남들이 뭐라고 하든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다고 말해줄 거야. 우리가 만든 책들이 남아있고, 우리는 그저 행복했노라고.”
바다에는 오후 늦게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경포대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다. 아이는 정신없이 모래를 파며 놀고 남편은 모래사장에 앉아 맥주 한 캔으로 장거리 운전의 피로를 날리는 듯하다. 피곤했던 아이는 숙소에 돌아와 저녁부터 깊은 잠에 들었고 남편도 아이를 토닥이다 잠들었다.
나는 새벽 3시 반쯤 깨어 도무지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창밖의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 아이의 잠꼬대와 남편의 숨소리. 모든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고 마음은 더 시끄러웠다. 핸드폰이 꺼질 때까지 인터넷을 보다가 해가 뜰 무렵 바다로 나갔다.
10월이라 벌써 새벽 공기가 차다. 경포대 바다는 어제 낮에 보았던 때보다 훨씬 더 크고 거칠었다. 파도는 저 멀리에서부터 줄을 서서 차례대로 밀려오더니 육지에 가까워질수록 뒤엉키고 합쳐진다. 작은 파도는 큰 파도에 삼켜지고, 큰 파도는 더 큰 파도와 부딪혀 소멸되어 버렸다. 저 많은 물결 중에 무엇이 가장 큰 파도가 될지를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조용히 내 마음에 말을 걸어본다. 치열하게 살아도 왜 이토록 허전한지. 더 좋은 것을 취하려고 미래만 쫓다가 정작 현재의 나는 소외된 것이 아닌가.
구름 사이로 오렌지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몸에 온기가 느껴졌다. 바다와 모래사장이 모두 금가루를 뿌린 듯 눈부시게 빛난다. 나는 햇빛이 비치는 곳을 따라 해변을 걸었다. 그러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조개껍질 무더기를 발견했다. 이 무덤은 어째서 이렇게 아름다울까. 나는 아이에게 보여주려고 예쁜 조개껍질을 몇 개 골라 주머니에 넣었다. 구멍이 뚫린 조개는 줄로 엮어 목걸이를 만들어줘야지. 아이는 조개껍질과 보석의 차이를 아직 모른다. 그저 모두 반짝거리는 장난감일 뿐.
일출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금빛 바다를 보며 저마다 감탄한다. 사람들은 왜 일출과 석양을 보는 것을 좋아할까. 마치 세상의 끝 같은 수평선과 그 선을 따라 붉게 번지는 하늘과 금빛 바다. 낮과 밤이 만나 펼쳐지는 이 장관을 바라보고 있자면 우리 인생에서 벌어지는 온갖 드라마도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몰아치는 감정의 파도를 멈출 수는 없지만 조금 떨어져 바라볼 수는 있다. 바다에 빠져 헤엄치고 있을 때에는 해변에서 바라보는 일출의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 나는 새벽의 진짜 이름을 찾으려고 계속 걸었다. 새벽은 낮과 밤 사이에 있지 않다. 우리가 어제와 내일이라고 말하는 환상 사이에 유일하게 실재하는 시간. 그것은 바로 지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