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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읽다.

며칠 전 아내가 점심 약속이 있어 혼자 집에 있는데 얼마 전에 우리 집 근처로 이사온 둘째로부터 같이 점심 식사를 하자는 전화가 왔다. 아빠 혼자 식사할 것을 알고 배려하는 모양이다. 나는 오랜만에 첫 시집 출간 얘기도 할 겸, 흔쾌히 딸의 제의를 수락했다. 동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서 딸애가 자기네 집에 가서 차나 한 잔 하자고 한다. 

딸애 집에는 내가 좋아하는 믹스 커피가 없어서 망설이고 있는데, 딸애가 알아차리고 건물 1층 편의점에서 믹스커피 한 통을 사가지고 가자고 한다. 편의점 직원은 이사 온지 얼마 안 되는 딸애를 벌써 알아보는지 눈 인사를 한다.

믹스커피를 들고 딸 아이 아파트 현관에 들어섰다. 딸애는 오전에 미처 치우지 못해 집이 많이 어수선하다며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다. 딸아이가 주전자에 물을 채워 끊이는 동안 나는 식탁 위에 놓인 책 두 권을 발견했다. 아직 안 읽었는지 새 책 두 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제목은 ‘불편한 편의점’이다. 아니, 편의점이 불편하다니, 편의점은 가격은 다소 비싸도 편리한 곳이 아닌가? 나는 궁금해서 1권을 손에 들었다.

딸애가 나를 보더니 ‘요즘 베스트셀러예요. 한번 잡으면 손에서 놓기 싫어 끝까지 읽는대요.’라고 한다. 

책의 뒷 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아니 죄송할 건 없고요…. 좀 불편하네요.”  “어쩌다 보니…불편한 편의점이 돼 버렸습니다”

아마 점원과 고객의 대화인 듯하다. 호기심에 끌려 첫 장부터 읽다가 ‘믹스커피 설탕을 얼마나 조절할까요’ 하는 딸애의 말에 책에서 눈을 떼었다. 그 사이에 10여 페이지를 읽었는데 다음 내용이 계속 궁금했다. 딸애가 ‘재미있죠? 집에 가져가서 아빠가 먼저 읽고 주세요. 나는 나중에 읽을께요’라고 한다. 얼른 읽고 싶어 책 두 권을 들고 잰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책을 빨리 읽는 편이 아니다. 특히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책을 읽다가 행간을 되돌아가서 다시 읽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아마 젊었을 때 독서량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자책하곤 한다. 그래서 속독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내가 잘 아는 병원 원장 한 분은 60대 중반인 지금도 400여 페이지 전문서적 한권을 2시간이면 완독하는 걸 보았다. 딸 아이도 아직 젊어 그렇다지만 굉장히 속독이다. 그냥 책장을 넘기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나보다 책 내용을 더 잘 기억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2권의 책을 3일만에 내리 읽었다. 정독에 가까운 느린 내 독서스타일에 비추어 보면 꽤 빨리 읽은 편이다. 그만큼 ‘불편한 편의점’은 호기심을 자극하며 나를 이야기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책 뒷 표지에 쓴 추천작가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서울역 홈리스로 지내면서도 자기의 안위보다는 지갑을 잃어버린 낯선 부인의 안부를 걱정하는 독고씨, 
그런 독고를 향해 우정과 치유의 손길을 내미는 편의점 사장 여사,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의 역사는 코로나 사태 이후 고독과 불안을 더욱 예민하게 느끼게 우리들에게 눈부신 영감의 씨앗을 심어준다. 모두가 무시하고, 외면하고, 회피하던 홈리스 독고 씨의 변신은 어쩌면 놀라운 사실이다. 독고 씨의 진짜 재능은 많은 사람을 너끈히 구할 있는 눈물겹도록 따스한 마음이기에….’

소설을 읽다보면 빠르고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와 독고씨에 대한 궁금증에 끌려 책장을 계속 넘기게 된다. 또한, 중간 중간에 작가의 재치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어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극작가 인경씨가 편의점에서 초조하게 독고씨를 찾다가 계산대위에 ‘급똥 잠시만요’ 라는 쪽지를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내가 다 실소를 터뜨리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불편한 편의점’의 내용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로 인해 생생하게 떠오른 나의 오래된 기억, 지난 날의 후회스러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다.

나의 아픈 과거 이야기를 무의식의 저장고에서 끄집어내 준 이야기는 바로 무능한 의료기기 외판원 아버지 이야기였다.

참새 방앗간이라 부르며 늦은 퇴근시간 마다 편의점에 들러 소주 한 병을 마시는 외판원 아저씨. 그가 독고씨로부터 딸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대목에서는 나도 마음이 뭉클했다. 무능한 남편이라 자기를 무시한다고만 생각했던 아내가 딸에게 ‘아빠가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는데 비싼 초콜릿을 사느냐, 1+1일 때만 사라’ 고 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두 딸이 1+1으로 판매할 때 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청파동에서 가장 예쁜, 잘 자란 두 여자아이에게 오늘은 초콜릿이 1+1으로 되었으니까 사가시라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부산으로 진학했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내 실력이면 부산 명문 P중학이나 K중학에 입학이 가능하다고 추천했지만, 아버지는 D중학도 명문이라며 D중학 근처 고모님 집에다 하숙을 시켰다. 

고모님 집은 복천동 언덕배기 판자촌이었다. 고모님네 대가족 속에서 여러모로 불편한 나는 아랫 동네의 신흥주택가였던 부촌에 사는 D중학교 친구집에 가서 숙제도 하며 거의 어두워질 때까지 지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친구네 부모님도 내가 가면 언제나 친절하게 맞아 주셨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부터인가 건너편 다른 판자촌 마을의 친구 한 명이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 친구가 사는 신흥주택가 입구 삼거리에는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길바닥으로부터 서너 계단 축을 쌓아 단층으로 깨끗하게 지은 주택에 살림집 겸 가게로 사용하고 있었다. 가게는 요즘으로 치면 편의점처럼 여러가지 물건을 파는 잡화점이었다. 주인은 중년의 젊은 아주머니였는데, 우리가 연필이나 공책을 사러 가면 항상 친절하게 잘 대해 주었다. 

어느 날 친구가 과자를 사는데 뒤에서 서성거리던 다른 친구 녀석이 빵을 하나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키득거리며 그 빵을 나누어 우걱 우걱 씹어 먹었다. 그 뒤로도 초겨울까지 서너 번 그런 일이 있었다. 

그 가게는 밖에다 콩나물과 두부를 내다 놓고 팔았는데, 어느 날 친구 녀석이 배가 고팠던지 두부를 한 모 훔쳐 친구집으로 왔다. 우리는 부엌에서 두부를 잘라먹다가 친구 누나에게 들켰다. D여고에 다니는 누나는 나를 많이 예뻐해 주며 챙겨 주었는데, 그런 누나가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친구 엄마에게 일러 바쳤다. 친구 엄마는 우리를 그 가게로 끌고 가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사과 시켰고, 주인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두부 값과 서너 번의 빵 값을 모두 치르고 돌아왔다. 

그 뒤로 나는 친구집을 다시는 갈 수 없었고, 만날 수도 없었다. 친구 아빠가 나를 ‘도둑질하는 친구, 질 나쁜 친구’라며 교제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것에 대해, 또는 그 행위를 의심받는 것에 대해 극심한 죄책감과 결벽증에 시달렸다. 내가 훔치지 않았더라도 공동으로 의심을 받게되면 그 상황 자체를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가게 아주머니는 어쩌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왜 모른 척 했을까?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스스로 깨닫기를 자랐을까? 아니면 가난이 일상인 그 당시에 그 정도는 너그러이 눈감아 준 걸까? 

’불편한 편의점’은 그렇게 기억의 저장고에서 어린시절의 아픈 기억을 꺼내어 건드렸다.

아래는 7년 전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내가 편의점에서 사온 김밥을 먹는 것을 보고 쓴 시다.

편의점 1

골목안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한개를 꺼내

먹고 있다.

너는 왜

삼각형이야?

너의 반쪽은

어디갔니?

글쓴이

이종철

리아북스 대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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