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우리는 녀석을 까미라고 불렀다
도움닫기 한 번으로 책장을 뛰어오르던 용맹도
창밖 비둘기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앞발을 치켜들던 위엄도
참치 캔을 든 아내 뒤를 따라 걷던 뒤태의 우아함도 없이
늘어져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녀석이 언제나 최상의 감각을 유지하던 꼬리는
소중한 자존심인양 길게 소파위에 늘어뜨리고
내가 본 복식호흡 중 최고였던, 그래서
가끔 나도 흉내내어 본 들숨 날숨도
가늘게 목 근육만 움직이며 반쯤 벌린 입밖으로
힘없이 내보내고 있었다
입가의 멋진 수염 몇 가닥을 가늘게 떨면서
퀭한 눈동자가 점점 흐려지고
수염도 점점 희미하게 움직인다
앞다리 사이 가슴께에 손을 대 보았다
아직 그곳은 따뜻하다
응급실, 흰 가운 둘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내 차례는 멀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늘게 들리고
호흡은 점점 힘들어진다
이상하게 고통은 없다
나만 이런 시련의 시간을 몇 번씩 겪는가?
마음 한 켠에서 서러운 마음이 밀려온다
나는 차라리 숨을 멈추고 싶었다
자꾸 희미해지는 의식을, 차라리 한꺼번에
깜깜한 암실 구석에다 필름 통째로 버리고 싶었다
벽시계 초침이 저리도 느릴 수가 있을까
다시 숨을 멈추고 싶어진다
그냥 숨을 참으면 되겠지 숨을 안 쉬면 끝나겠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휠체어가 흔들리는 듯, 그리고
주위가 깜깜해졌다
웅웅거리는 말소리. 분주한 발걸음 소리.
누군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는 것 같다.
‘아버님 눈 떠보세요.’ 간호사의 다정한 모습.
아내가 눈이 퉁퉁 부은 초췌한 얼굴로 옆에서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간호사가 ‘아버님,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퇴근하자,
아내가 의자를 당겨 바짝 다가 앉는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제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당신 수술하고 밤새 중환자실에 있다가 이제 올라왔어요’ 하며
내 손을 꼭 잡는다.
실패한 것인가? 선을 넘지 못했구나.
그리고 두 달 후 의사와 상담하고 기관절제수술을 했다.
삶의 질을 위해 목소리를 잃기로 결정한 것이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나는 마음껏 먹을 수 있고
크게 심호흡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운동량을 늘려 나갔다.
건강은 수술 전 상태로 돌아왔고 삶은 말 그대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에너지로 살아가고 있다.
산책 중에 보이는 것, 풀밭과 나무와 새들
귓가에 들리는 개울물 소리까지
새롭고 사랑스럽다.
시도 쓰고 책도 읽고 운동도 하며 보내는 하루는
그야말로 내 생의 화양연화이다.
말을 할 수 없으면 어떠랴.
이 나이에는 침묵도 수양이지.
어찌 석양이 황홀하지 않을 수 있을까!.
[ 2 ]
나는 까미라는 고양이다
고양이로 태어나 아직 엄마의 품이 그리운 내가
어둠과 두려움 속에서 아마 사흘 밤낮을 울었을까
기아와 탈진으로 숨쉬기가 힘들어
혼미한 정신줄을 막 놓을 즈음
눈앞에 작은 구멍 하나가 생기며 강렬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희미하게 움직이는 인간의 얼굴 하나가 다가온다
흐릿해서 잘 볼 수가 없지만
온 몸을 찍어 누르던 돌무더기를 헤치는 인간의 빠른 손길이 보인다
한 사나운 인간에 의해 돌무덤 속에 갇혔던 내 삶이
비로소 밝은 빛을 보았다
처음 한 동안은 엄마의 따뜻한 목소리를 장롱 뒤 틈에서 들었다
두 아가씨들의 애정어린 소리도 들었다.
내 몸에 검은 줄이 얼룩말처럼 둘러처져 있다고
까미라 부르는 사랑스런 두 아가씨
엄마가 언니들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내 이름은 까미가 되었다
지금 그 언니들 보고싶다
이 인간이 내 곁에서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손가락 끝의 따뜻함이 정수리에 느껴진다
요 근래 부쩍 목덜미랑 배, 턱밑에다 애정표시를 한다
이 인간 손길은 늘 불안했었다
내가 책장으로 단번에 뛰어오르거나
거실에 떨어진 단추 하나 주워 축구장인 양 앞발로 몰고 다니면
이 인간 손길은 애정수준을 넘어 감격의 그루밍을 남발한다
언젠가 안방 문 손잡이를 점프해서 돌려 열었더니
이 인간 박수까지 치더라고, 그러다가
내가 한밤 중에 운다고 사정없이 베란다에 가뒀었지
치사하고 졸렬했어 밤에 우는 건 우리의 본능인데
참, 지들만 2박3일 여행가서 외롭고 무서운 밤 소파에 실례를 했더니
이 인간 내 엉덩이 팡팡 치더라고 뭐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가끔 귀찮고 힘들게도 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어
늘 내 건강을 고려한 식사와
졸다가도 알 수 있는 맛난 참치 닭고기 간식
엄마가 정성스레 챙겨 주신다
간식을 쥔 그녀 뒤를 따라 갈 때는
내 꼬리는 꼿꼿이 서고 네 발은 일직선으로 걷는다
선택받은 자의 거만함과 우아함을 뽐내며
이인간이 목이 아프다더니
어느 날은 병원에서 돌아왔는데
인간이면 다 하는 말을 못하더라고
나와 똑같이 컼컼 소리만 내더라구
더이상 귀찮은 명령을 듣지 않아 좋았지만
참 쓸쓸하고 초라해 보였어
병원생활 한 달쯤 되는 동안 엄마가 고생이었지
내 챙기랴, 병원에 있는 이 인간 간호하랴
내가 좀 미안하더라구
작은 언니가 틈틈이 찾아와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로 나를 부를 때는 행복했었지
그 언니 참 고마운 언니야
내 일용할 양식과 맛있는 간식, 화장실 휴지까지 다 보내 주었으니까
덕분에 나는 일생을 꽤 호강하며 살았지
우리는 왜 인간보다 생이 짧을까
인간은 어찌 우리보다 훨씬 더 긴 백 년이나 살까
내 주검을 그들은 어떻게 할까
내 사후를 그들은 알 수 있을까
눈을 뜨고 있는데 왜 점점 어둡지
세상이 구름에 가린 초승달처럼 작아지고
주위가 깜깜해진다
[ 3 ]
잠깐이었다 아주 잠깐
내 의식이 잠깐 자리를 비운사이
다시 들여다본 녀석의 눈이 촛점을 잃었다
수염 끝이 미동도 않는다
끝인가, 아직 가슴은 따뜻하다
눈을 감겨야겠다
윗 눈꺼풀만으로는 감겨지지 않는다
아래 위를 조금씩 당겨 겨우 가렸다
아내가 돌아왔다
사들고 온 장바구니를 대충 정리한다
미동도 없이 차가워진 녀석 가까이로 다가온다
이제는 알려야 한다 애써 침착하게
여보, 까미가 갔어
한시간 전 쯤부터 움직임이 없어
아내는 알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지만 순간
눈가가 가늘게 흔들렸다
어떻게 할 거예요
병원보다는 그냥 뒷산으로 갑시다 불법이지만
산책할 때도 바라보게 뒷산으로 가, 까짓거 벌금 좀 물지 뭐
아내는 말없이 광에서 꽃포장 상자 하나를 꺼낸다
얼마전 직접 오려 붙인 조그만 종이 상자다
녀석은 의외로 가벼웠다. 작은 나뭇가지 같았다
상자에 다리가 걸린다
조심해서 접어 넣었다
아내가 흰 수건으로 정성껏 덮고 뚜껑을 닫았다
방안의 서늘한 공기가 상자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녀석이 웅크리고 있던 구석 구석이
텅 비어 버렸다
아내의 뺨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또 한 시간쯤 흘렀을까
아내가 둘째와 통화 중이다
엄마 절대로 안돼요. 불법이에요 시댁 어른께 말씀드렸어요
여기 우리 산에다 절차대로 해서 까미 보내줄래요
기다리고 계세요 오빠랑 지금 가고 있어요
녀석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녀석은 우리의 긴 백년이 부러웠을까?
목소리 없이 살아가는 나의 삶이 부러웠을까?
녀석이 우리에게 남긴 세월을 다 살아 보아도
우리는 녀석의 사후를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