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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비와 홍수, 그리고 트라우마

비

 나에게특히장맛비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2개 있다.

 첫 번째는 내가 청소년기인 70년대 초반의 음악 다방이다. 그 시절 나는 비 오는 날이면 음악 다방에 눌러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스스로의 모습은 당시 젊음의 낭만이었고 멋이었다. 그 중에서도 팝송 ‘Who’ll stop the rain’ (누가 비를 멈출게 할 것인가)은 당시 즐겨 듣던 곡 중 하나이다.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록밴드 CCR이 부른 컨트리풍의 편안한 rock인데, 당시에는 이 노래가 상징하는 의미도 모른 채 그저 리듬과 쉬운 가사가 좋아 따라 부르곤 했다.

 두 번째 장면은 초등학교 시절 겪은 가슴 아픈 사건이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낙동강이 흐르는 김해 평야의 북쪽 끝자락 장유라는 곳이다. 지금은 신도시로 변하여 10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형적인 산과 들이 펼쳐진 아름다운 농촌의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 마을은 양평 두물머리 처럼 두 하천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강가의 마을이었다. 범동포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작은 고깃배가 2~3척 떠있는 아주 작은 포구(강나루가 맞는 표현일 듯)가 마을 옆에 위치한 곳이다. 말이 강이지, 녹산이라는 지역에서 낙동강을 만나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하천에 불과한 강이다. 고깃배들은 평소에는 강을 오르내리며 고기를 잡았고, 그 중에서 유일하게 기관을 달고 있는 큰 배는 녹산읍 장날에 장삿꾼들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농촌에 불어닥친 새마을 운동이 우리 마을에 시작되기 전에는 여름이면 마을은 홍수로 강이 범람하여 온 마을이 통째로 침수되는 경우가 내 기억으로 서너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상류 쪽에 있는 학교로 피난을 갔다. 아이들은 아빠 엄마 등에 업히거나 고깃배를 함께 타거나 해서 침수되지 않은 곳까지 갔다. 그 곳 사람들은 측은한 듯 우리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우리는 면사무소 직원들이 제공하는 음식과 이부자리 등으로 하루 이틀을 버티며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어른들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기다렸다.

 강가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은 태어나면서 걸음마와 동시에 물에 뜨는 법을 배운다. 형이나 언니들과 함께 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며 자라기 때문이다.  근동에 사는 아이들이 여름에 강에 와서 놀다가 사고가 난 경우는 몇 번 있었지만, 우리 마을 출신 아이들이 강에 빠져 익사한 경우는 전무했다.

 그런데 그 해는 우리마을 사람들 셋과 옆 동네 사람 몇 명이 익사하는 대형사고가 난 것이다. 모내기가 한창인 6월 초. 며칠째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 있었지만, 그날은 바람도 선선히 불고 비도 가늘게 내려 모내기 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내기 품앗이를 하기위해 아침 일찍 강 건너 모내기 논으로 배를 타고 건너갔다. 오전까지는 가늘었던 빗줄기가 오후에는 소나기로 변하여 퍼부었고 바람도 세차게 불어 모내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서둘러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그러나 배가 강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세찬 바람과 거친 물살에 배가 크게 흔들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람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작은 고깃배는 여지없이 뒤집혔다. 건장한 남자들은 헤엄을 쳐 떠 내려가며 강가에 다다랐지만, 약한 여자들은 급류에 휩쓸려 익사한 것이다. 이 사고는 내가 어렸을 때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날 저녁에 마을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들었었다. 며칠 후 강에서는 죽은 혼들을 위한 굿을 하며 위령제를 지냈다. 재첩 잡는 거랭이로 강바닥을 긁어 익사자의 머리카락을 건진다고 하는데, 그 분위기가 여간 엄숙하지가 않았다. 옆집 친구 상철이 누나도 그 날 그 배를 타고 있었다. 상철이 부모님은 굿을 하고 얼마 후 상철이와 함께 타지로 이사를 가버렸다. 딸을 잃은 부모가 더 이상 그 강물을 바라보며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사고가 있고 난 후 아이들은 한 동안 밤중에 강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강 상류 쪽 계곡에는 밤 마다 도깨비불이 나타난다고도 했다. 나도 무서워 아무리 더워도 해가 진 뒤에는 강물에 들어가 수영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이 칠십을 바라보는 지금도 장마철에 홍수가 나고 인명피해가 났다는 소식을 접하면 어릴 때 겪은 홍수와 그 사건이 생각나 몸이 긴장을 한다

 올 여름에도 예외없이 장마가 찾아왔다. 6월 하순에 시작된 장맛비는 이미 곳곳에 피해를 주어 결국 한강 잠수교가 통행이 금지되었고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서울의 올림픽도로와 전국의 많은 도로도 통행이 금지되었다. 지난 14일부터 쏟아진 집중호우로 산사태와 하천 범람, 도로침수, 특히 안타까운 지하차도의 침수까지 이어지며 재산 피해 뿐만 아니라 고귀한 인명까지 앗아갔다. 올해 장마는 특이하게 이미 예년 강수량의 2배이상을 특정지역에 물 폭탄세례를 퍼붓고 있고 아직 그 끝이 언제일지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소식이다. 하루 빨리 장마가 끝나고 피해지역의 복구도 신속히 이루어져 국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글쓴이

이종철

리아북스 대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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