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애 집을 다녀온 아내가 두툼한 원고지 한 묶음을 내게 건내 준다. 리아북스 발행인인 사위가 시집 퇴고를 위해 출력한 원고를 보낸 것이다. 하얀 A4 원고 뭉치가 책의 모양을 갖추어 손에 두툼하게 잡힌다. 드디어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나의 창작물이 나올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다.
첫 장 상단에 ‘바람처럼 갈수 있다면’(가칭)이라고 제목이 붙어있고 마지막 장까지는 총 121페이지이다. 내가 보낸 시가 64편인데 페이지 수로만 계산하면 거의 2배 분량으로 늘었다. 목차는 총 4부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는 시를 장르별로 분류하여 배치하였다. 1부에 대략 16편 안팎의 시가 배분되어 있다. 내가 분류하여 보내 준 시의 순서를 살리면서도 시집을 읽을 사람을 생각해서 순서를 바꿀 거라는 편집장의 말이 생각났다. 내 경험에도 시집을 손에 잡아 읽기 시작하면 몇 편을 못 읽고 집중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같은 장르의 시를 계속해서 읽다 보면 상상력은 엉뚱한 곳으로 가 머물고, 그러면 읽고 있던 시와 동 떨어진 다른 상념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그런 점에서 편집장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시의 나열에 대해서는 다음 회의 때 좀 더 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충 원고를 넘기며 살펴보니 중간 중간에 백지 상태의 간지가 끼어 있다. 좋은 사진이나 그림을 넣을 공간이다. 특히 각 장 첫 페이지에는 그 장의 대표시 중에서 따온 시구를 옮겨 쓰고 그 아래에 출처를 밝혔는데 그 의미에 맞는 그림이나 사진을 배치하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장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내가 할 일은 이제부터 퇴고를 해야 한다. 그것은 순전히 내 몫이다. 64편의 시를 다시 정독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내가 쓴 시인데도 왠지 낯설다. 노트북에서 여러 수십번을 읽고 수정하고 했던 내 시가 종이에 활자가 되어 행과 연을 갖추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니 마치 다른 사람의 시를 읽는 것처럼 느껴진다. 독자의 관점에서 새롭게 읽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수정할 부분이 나타났다. 다시 읽어보니 부적절한 조사의 사용, 부자연스러운 행과 연의 구분 등 수정할 부분들이 너무도 많았다. 한 연을 통째로 삭제하기도 하고, 시 전체를 아예 2편으로 나누어 버리기도 했다.
특히, 제목 자체를 바꾸어 버린 것도 2편이나 된다. 예를 들면 ‘예순다섯의 아내’ 라는 시인데 ‘예순다섯의 소녀’로 바꾸어 버렸다. 이 시는 아내가 65세 되던 해 생일 축하시로 쓴 시이다. 당시에는 생일을 맞은 아내를 위해 ‘예순다섯의 아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이제는 시집에 실을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시적 감흥이 나는 ‘소녀’로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었다. 아내에게 의견을 구하자 처음에는 무엇하러 그것을 시집에 실을려고 하냐며 만류했지만, 나의 뜻이 완강함을 알고 마지못해 소녀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동의했다. 제목이 ‘아마도’인 시는 4연의 짧은 시인데, 전반 2연과 후반 2연이 소재의 차이에서 오는 감흥이 달라 아예 2연씩 묶어 2편의 시로 나누어 버리고 각각 ‘아마도1’ 과 ‘아마도2’로 제목도 나누어 붙였다. 산만했던 시가 간결해졌고 읽기도 편해졌다.
3일 간의 퇴고를 거친 끝에 원고는 온통 붉은 색 볼펜 자국으로 얼룩졌지만 내 마음은 흐뭇했다. 이제 이 원고를 독립출판사 리아북스로 넘겨주면 편집장이 수정할 일만 남은 것이다. 늦깎이 시인이 첫 시집의 출간을 아마추어 독립출판사와 함께 한걸음씩 느리게 나아가고 있는 이 힘든 모험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너무도 궁금하다. 전문가들에게는 매우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욕실에 앉아 때를 민다
등 죽지가 가려워 아내에게 부탁하자
당신 몸처럼 시원하게 밀어준다
은퇴 후 느리게 가는 시간들 사이에
아내의 삶을 기웃거린다
시골집 아랫목에 좌정하신 아버지 말씀
형제는 콩 한조각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동생 넷은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모로 앉은 어머니는 반가움 반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서울서 인사 온 얼굴 하얀 25세 처녀를 향해
아내는 그렇게 나와 부부가 되었다
언제인가 기억은 없다
아마 아내가 마흔을 넘겼을 때 쯤
콩나물을 다듬으면 아버님 말씀이 생각난다고
자기 인생이 순탄치 않을 걸 그때부터 짐작했다고
아내는 그때 씁쓸하게 웃었다
딸 둘 예쁘게 짝지어 내보내고
이제 예순을 그냥 훌쩍 넘겼다
빈둥대는 내 아침상 의무인 양 챙긴 뒤
스틱커피 향과 함께 라디오 음악에 귀를 맡긴다
손에는 책 한권
책 읽기를 좋아한다
며칠 전부터는 장편소설 '위험한 관계'가 곁에 있다
내용이 궁금하여 나도 읽어 봐야겠다
단지 제목에 대한 호기심일 뿐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자작나무 숲이었다
키 큰 자작나무 한 그루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가늘게 뜬 눈으로 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다
그녀는 자작나무가 참 좋다고 했다
이름과 하얀 껍질의 촉감이 좋아서 라고
고향 강 기슭에 자작나무 한 그루 자란다
목선이 가늘고 긴
자작나무를 닮은 그녀
소녀의 모습으로 욕실을 나간다『예순다섯의 아내』 - 이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