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이는 1966년에 발표한 가수 이미자 선생님의 ‘섬마을 선생님’ 이라는 당대 최고 인기가요의 첫 1,2소절이다. 당시 나는 국민학교(요즘의 초등학교) 3,4학년쯤이었을 때이다. 나에게는 고모님이 세 분 계셨는데 막내 고모님이 꽤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로 시골에서는 접하기 힘든 라디오 방송을 어디서 듣고 이 가요를 배웠는지 들일을 하거나 밥을 짓고 빨래터에서 빨래를 할 때에는 부지깽이나 빨래방망이로 장단을 맞추며 흥얼거리곤 하셨다. 고모님을 따라 나도 자연스럽게 흥얼거리게 되었고 그 모습이 귀여웠던지 고모님이 나중에는 직접 음정과 가사를 가르쳐 주셨다.
나는 종종 툇마루에 걸터 앉아 이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그 툇마루에서 바로 보이는 뒤안에는 우물이 있고 우물 옆 담벼락 아래에 작은 화단이 있었다. 화단에는 예쁜 꽃들이 계절마다, 특히 봄부터 초여름에 각종 꽃들이 피었다 지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모란꽃이 꽃송이도 크고 탐스러웠다. 내가 ‘섬마을 선생님’ 노래를 부를 때에는 자연스럽게 모란꽃으로 눈길이 갔다. 그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해당화가 모란처럼 머리속에 인식되기 시작한 것일까? 사춘기를 지나며 당시 나도 또래 아이들처럼 포크송이나 팝송에 빠져들면서 ‘섬마을 선생님’과 해당화를 잊고 있었다. 적어도 지난 주에 강릉으로 아내와 여행가기전 까지는 그랬다.
지난주, 모처럼 아내와 1박2일 일정으로 강릉을 갔다. 아니 사실은 한달 전부터 언제나처럼 속초여행을 계획했었다. 속초에 가성비 좋은 콘도까지 예약을 해 놓고 딸애에게 리아 유아원 케어를 2일 동안 할 수 없다고 알렸다. 그런데 딸애가 부득부득 호텔을 잡아주겠다며 콘도예약을 자기손으로 취소해 버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최근에 개관한 강릉 해변의 한 호텔을 예약했다며 이번에는 강릉을 다녀 오시란다. 해마다 한두 번은 가는 속초의 해변과 설악산 계곡이 아쉬웠지만, 우리는 강릉에서 1박하고 귀가하면서 속초에 들르기로 했다. 자주 가는 식당에 가서 물메기탕으로 점심을 먹고 설악산도 잠시 들르기로 하고 강릉으로 향했다. 결국은 다음날 속초 물메기탕은 식당의 브레이크 타임으로, 설악산 계곡은 뜻하지 않은 이승만 별장 순방으로 허탕이 되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강릉 호텔은 생각보다 근사했다. 경포호와 강릉해변 사이 솔밭에 위치하여 양쪽을 바라보는 경관은 아름다웠고 특히 밤의 야경은 장관이었다. 아내와 나는 여행 가방을 풀고 해변을 내려다보면서 저녁 식사를 어디서 할 것인지 의논하다가 일단 나가서 산책을 하며 해변가로 쭉 늘어서 있는 식당들을 살펴보고 정하기로 했다. 해변가로 내려서니 백사장과 솔밭사이에는 나무 데크로 잘 정돈된 산책로가 해변 끝까지 조성되어 있었다. 오솔길도 좋지만, 오래 걷다 보면 모래가 신발에 차올라와 걷기가 불편한데 데크가 해변 끝까지 깔려 있어서 걷기도 편하고 깔끔해서 좋았다.
아내가 문득 ‘아, 이 꽃들 좀 봐요. 너무 예쁜데, 무슨 꽃이지?’ 하며 쪼그려 앉는다. 나도 아내를 따라 앉았다. 데크와 솔밭사이 중간 중간에 조성된 작은 화단이 있었는데 화단 가득히 키 작은 꽃나무가 있고 가지마다 예쁜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은 계절적으로 절정을 지났는지 피어 있는 꽃잎보다 지고 있는 꽃잎이 더 많고 진 자리에는 작고 앙증맞은 열매가 푸른 빛에서 붉은 빛으로 수줍게 변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궁금하여 휴대폰에서 꽃 검색 앱을 열고 꽃송이를 조심스럽게 찍어보았다. 왠걸 ‘이 꽃은 해당화일 확률이 90% 이상입니다’ 이럴 수가 해당화라니, 내가 아는 해당화라니? 아내도 해당화라는 내 말에 의심의 눈빛을 하며 ‘해당화가 종류가 많은가? 해당화는 꽃이 훨씬 더 큰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인터넷으로 해당화를 검색해 보았다. 우선 꽃은 지금 보고 있는 저 꽃이 분명하다. 이리 저리 사진들을 돌려 보아도 해당화가 분명하다. 위키백과에 [장미과에 속하는 작은 키 나무로 1~1.5m로 자라고 바닷가의 모래땅이나 산기슭에 군락을 형성하며 자란다.
7~8장의 잔 잎으로 이루어진 깃털 모양의 꽃은 5~7월에 피고, 8월부터는 주홍색 열매를 맺는다. 어린순은 나물로 먹고 뿌리는 당뇨병, 치통, 관절염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향수의 원료로도 사용한다 등등..] 길게 설명이 되어있다.
또 다른 앱에는 꽃에 얽힌 전설 2가지가 소개되어 있는데, 하나는 고려시대 원나라에 공녀로 뽑힌 소녀와 동생의 이야기로, 원나라로 가는 누나가 탄 수레가 보이지 않아 동생이 목놓아 울며 누나를 부르다가 죽었는데 그 모래밭에 붉은 해당화 꽃이 피어났고 사람들은 그 꽃을 동생의 넋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두번째 전설은 중국 당나라 현종이 사랑한 양귀비의 이야기로, 현종이 양귀비를 찾았는데 양귀비가 어제 마신 술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채 현종 앞에 나가자 현종이 ‘너는 아직 술에 취해 있느냐’ 라고 물으니 양귀비가 ‘해당화가 아직 깨어 나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불그스레 홍조를 띤 자신의 얼굴을 해당화에 비유한 것이다. ‘
과연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꽃은 위의 2가지 전설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작고 수줍은 듯 슬픈 모습, 그러면서도 천진스레 붉은 홍조를 띤 꽃잎과 차마 떨치지 못해서 아직 매달고 있는 시든 꽃잎을 푸른 빛을 붉혀가며 앙증스레 익어가는 열매를 보고 있으면, 첫번째 이야기와 맞는 것 같다. 내가 부르던 ‘섬마을 선생님’ 노래 속의 해당화 즉, 꽃송이가 크고 화려한 모란꽃의 모양이 아닌 작고 천진스러운 바닷가의 아이를 닮은 눈 앞의 이 꽃이 해당화인 것이다.
문득 지금까지 실체를 잘못 알고 있었던 해당화에게 미안했다. 하버드대 다니엘 샥터 교수가 말하는 기억의 7가지 오류 중에서 기억의 오작동에서 오는 오류 ‘오귀인(誤歸因: misattribution) 즉, 기억의 출처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데서 오는 오류를 내가 범해 왔던 것이다. 내 기억의 오류가 바로 잡히면서 나의 뇌리에는 바닷가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과 해당화가 진 자리에 발갛게 달린 열매들이 겹쳐지며 어떤 단어들이 떠올랐다. 나는 휴대폰 문자판에 급히 몇자를 적었다. 그리고 저녁에 해변을 내려다보며 시 한 편을 썼다.
그 바닷가에는
꽃들이 피어난다
꽃송이에 가만히
귀 대어 보면
해녀 숨비소리 들리고
꽃잎 속을 한참 들여다보면
멀리
고깃배가 그물을 걷는다
꽃송이들은
저마다 그 바다를 품고 핀다
해풍이 불고
파도가 밀려오는 그 바다
그 바닷가에는
얼굴이 발갛게 익은
아이들이 자란다.『해당화』 - 이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