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아내와 대화 중에 느닷없이 ‘아빠는 박식하셔~’ 라고 하는 말을 옆에서 듣고 멍해진 순간이 있었다.
‘박식하다’는 말은 사전적으로 ‘지식이 넓고 아는 것이 많다’ 라는 의미인데, 과연 내가 그런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가? 라는 자조적인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박식하다’라는 형용사를 쓸 때는 무슨 무슨 박사를 지칭하거나, 또는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이 이것저것 사물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을 이르러 우스개 소리로 하던 ‘만물박사’의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딸은 둘 중에 어느 것을 지칭하며 한 말일까?
딸애가족이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지금 사는 집을 팔고 은행대출을 보태어 조금 더 큰 집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같은 아파트 단지는 아니지만 걸어서 10분 정도의 지척거리라 바로 이웃 집처럼 느껴진다. 더욱이 그 단지내에는 초.중.고교가 위치하여 아이 교육에는 안성맞춤이라고 아내가 더 기뻐한다.
오늘도 딸애는 시간을 내어 이사할 집 인테리어 공사를 살펴보려고 왔다. 다른 사람이 살던 집이라 실내 도배를 다시 하고 싶었는데, 내친김에 벽장이랑 싱크대도 바꾸고 선반도 요즘 젊은 취향에 맞춰 달기로 했단다. 우리에게 이사라면 사십여년을 살면서 주민등록표 칸이 부족하리 만치 많이 해본 경험이 있다. 그런 아내의 조언하에 2주간의 공사가 막바지로 진행중이다. 아내와 진척상황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늦은 점심식사를 끝내고 아파트 단지 주변 산책길에 나섰다.
요즈음은 어느 지역 없이 신축 아파트 단지를 조성할 때면 조경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입주민 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건축법 상으로도 기본적인 조경을 조성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아파트의 조경이 남한산성 산세와 잘 어우러져 멋있게 꾸며 졌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런데 딸애가 이사 오게 될 단지 뿐만 아니라 그 옆 단지도 매우 아름답게 잘 가꾸어져 있었다. 아스콘이나 탄성포장재로 깨끗하게 조성된 산책로, 각종 화초와 조경수가 조화롭게 배치된 화단, 화단 중간 중간에 휴식과 담소를 할 수 있는 벤치, 이 모든 풍경을 흐뭇한 표정으로 둘러보던 딸애가 “저 나무 꽃 참 이쁘네 무슨 꽃이지?” 아내를 보며 묻는다.
아내는 “그러네 이쁘네, 아빠는 알텐데~” 하며 나를 바라본다.
내가 보니 산딸나무가 녹색 나뭇잎 위로 순백의 꽃잎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건 산딸나무 꽃이야.”
나의 대답에 딸애는 다소 실망의 눈빛으로 “산딸~ 이라고요” 라고 중얼거린다. 아마 꽃이름과 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눈치다.
“응 산딸이라고 가을에 딸기 모양의 열매가 열린다”라고 말하자 “아, 딸기 같은 열매가 열려요”하며 그제사 수긍하는 모습이다.
“저 꽃잎을 자세히 봐. 십자모양으로 꽃잎 네장이 가지런히 피어있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의 십자가가 저 나무라는 거야. 그래서 꽃잎이 십자모양으로 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 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아내와 함께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딸애가 무심결에 “아빠는 참 박식하셔~” 라고 웃는다.
나는 순간 멍해지며 박식하다는 말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야, 우연히 그것만 알고 있을뿐이야”라며 웃어넘겼다.
내가 산책을 하기 시작한 것은 수술 후 직장을 그만 둔 이후부터이다. 전에 살던 집 근처에 올림픽 공원과 성내천이 한강으로 이어져 있어 2시간 정도의 산책 코스로는 안성맟춤이다. 잘 알려진대로 올림픽 공원은 수목과 화초의 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식물들이 가꾸어져 있다. 저마다 명찰(식물이름표)을 달고 있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식물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된다.
나는 사계절을 지나며 변화하는 화초와 수목을 사진으로 담았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특징이나 생장과정, 약재로서의 효능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도 흥미롭게 읽고 기억했다. 내 시에 꽃과 나무가 주제나 소재로 쓰인 시가 많은 이유가 그래서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아파서 직장을 잃은 대신 산책의 즐거움을 얻었고, 말을 잃었지만 글쓰기의 재미를 얻었으며, 아울러 글쓰기의 소재가 산책로에서 접하는 꽃과 나무라니 참 감사할 일이다.
이사한 이 곳 또한 남한산성에서 발현하는 창곡천이 복정역까지 이어진 수변공원 산책로가 있고 이곳 산책로 역시 잘 조성된 화초와 조경수가 나의 산책길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저마다 깔끔하게 이름표를 달고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나의 식물 공부는 이곳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박식하다’는 말이 박사를 떠올리게 하는 형용사이거나 만물박사를 뜻하는 우스개 말이거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딸아이가 그냥 하는 흰 소리가 아닌 무심결에 나온 나에 대한 존경의 평가로 받아들인다면 나만의 자만심일까? 혼자 빙그레 웃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