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북스

#27. 시공간 속으로 여행

2박3일. 실로 오랜만의 혼자 여행이다.
울산에 사는 동생을 만나 김해에 계신 어머니 면회를 하고, 시간이 되면 수 년간 뵙지 못한 고모님을 뵈올 생각으로 오래전부터 계획한 여행이다.
아내에게 자유시간도 줄 겸,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한달 전부터 일정을 짜고 열차표도 예약해 놓았다. 수서역에서 10시에 출발하여 울산역에 12시5분 도착, 정확히 2시간 5분 간의 기차여행이다.
오전 부산행 하행선이니 눈부시지 않고 창밖 경관을 볼 수 있는 오른쪽 창가 자리를 잡았다. 그것도 통창으로 경치를 편히 보려면 좌석위치를 잘 봐야 한다. 기차 안에서 멍하니 창 밖 풍경을 보는 것도 큰 재미가 있다. 마침 7호차 11D 통창 옆좌석이 비어 있었다.
당일 아침 수서역에 도착하니 9시 20분이다. 승차까지 40분이나 남았다. 카카오 택시 기사 분이 혹시 대화가 불편한 나와 소통이 어긋날까봐 걱정이 되어 시간 여유가 넉넉하게 호출했기 때문이다.
승차는 출발 15분전부터 가능하니 최소한 25분은 기다려야 한다. 지루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아내에게 문자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서 본 뉴스도 다시 봤지만 25분은 길었다. 그 동안 바쁘게 살아오면서, 또 병마와 싸우면서 나는 시간의 여유를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나 보다.
열차 객실청소가 끝나고 정확히 45분에 객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행가방을 선반에 잘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울산에서 마중 나올 동생을 위해 도착시간을 문자로 보내고 고개를 드니 객실 안 TV에 출발 안내 자막이 뜬다. 수서역에서 지제역까지 약 20분 동안은 지하의 철로로 다닌다. 사방이 밤중처럼 깜깜하니 자연히 TV로 눈이 간다. 가방에서 책을 꺼낼까 하다 옆자리 손님에게 불편을 줄 것 같아 참으며 전면 TV를 본다.

그렇게 20분 후. 눈이 부시며 창밖의 경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 멀리 산봉우리가 연녹색 녹음으로 눈을 시원하게 하며 천천히 지나간다. 아래쪽 기슭의 벛꽃이 봄을 알리고 있다. 철로 옆 전신주는 형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휙 사라진다. 원근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공간 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열차는 천안 아산역에서 잠시 정차 후 다시 속도를 낸다. 건너편 철로의 상행선 열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40년전 고향에 오갈 때는 부산까지 버스나 무궁화호 열차를 주로 이용했었다. 그 때는 부산까지 6~8시간이나 걸렸다. 지금 이 열차는 시속 300km에 근접한 속도로 달려서 2시간 반이면 부산에 도착한다.

야구계의 전설인 선동렬은 당대 최고의 투수로서 야구공을 시속 150km를 넘게 포수의 글러브에 꽂았다. 타자들의 눈에는 그야말로 눈 깜짝하는 사이에 공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하던데, 이 열차는 지금 그 공의 2배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객실내의 승객들은 저마다 편안하게 여행을 한다.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사람, 열심히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사람… 어떤 사람들은 마시던 커피잔을 의자에 붙은 테이블에 내려놓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인천공항에는 자기부상열차가 있다. 지상 8mm의 높이에서 철로에 닿지 않고 달린다. 비록 최고속도 110km의 경전철 도시형이지만 공중부양식 공간 이동이다. 현재는 유지비용과 이용률 저하로 운행이 중단되었지만, 기술을 계속 개발 중이니 경제성과 효율성이 인정되면 곧 다시 운행할지도 모른다. 중국은 2021년에 최대 시속 620km의 자기부상열차를 개발해서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중량 1톤 이상의 차량을 시속 1,030km 속도로 이동시키는데 성공했다.
프랑스는 올해 초 기존열차 인프라를 이용할 수 있는 시속 550km의 자기부상열차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명 ‘하이퍼루퍼’라는 캡슐트레인이다. 이론상 최고 1,200km도 가능하다고 하는데, 부산까지 20분이면 이동할 수 있는 속도이다. 이러다가 정말 머지 않아 영화나 옛날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순간이동이 짜잔하고 현실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을까.

나는 물리학이나 천문학에는 문외한이지만, 지구는 시속 10만 km의 속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한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10만km 속도로 달린다니, 그것도 스스로 구르면서(자전) 달리고 있다니 기가 막히지 않은가? 알프스와 에베레스트에 눈을 덮고 오대양에 바닷물을 출렁이며 뒹굴면서 달리고 있다니! 인간이 123층 건물을 쌓아 올리던, 지하에서 무지막지하게 핵을 터뜨리던 그저 달리고 있다.

지구의 나이가 40억년이라고 하는데, 그 억겁의 세월을 우주 공간에서 고요히 달리고 있다. 숲과 땅과 물속에 수많은 생명들을 진화시키며. 아니 각자 스스로 진화해가는 그 생명들을 품고 우주 공간을 여행하고 있다.

문득 태양의 존재를 생각해본다. 태양이 영원히 타오를 수 있을까? 수십억 년 후에 태양의 열이 식지는 않을까? 혹시 수십억 년 전에는 화성이 지구처럼 생명체가 살수 있었던 행성이었던 것은 아닐까?
태양열의 부족으로 사막화되어 생명체가 살수 없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화성에서 보내온 사진에 물이 흐른 흔적이 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지구도 종내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만일 태양열이 식는다면, 그 다음으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은 어디일까? 어쩌면 금성이 태양에 더 가까우니 가능할지도 모른다.1960년대 이전에는 금성이 플로리다 해변처럼 아열대 기후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실제 금성은 표면이 400도 넘는 고온에 대기압이 높아 초속 100m가넘는 엄청난 태풍이 몰아치고 온통 황산으로 뒤덮여 있어 지옥 그 자체라고 한다. 1982년 미국의 금성탐사선(베레나13호)이 금성에 착륙하여 표면을 컬러로 전송하는데 성공하여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 후 화성과 함께 금성 탐사계획은 꾸준히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금성, 밝고 화려한 노란색 별, 비너스나 루시퍼처럼 아름다운 신들의 이름을 가진 별, 지구에서 관측할 수 있는 행성 중 3번째로 밝은 별이다. 어쩌면 억겁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인간은 그 아름다운 금성에서 또 다른 인류 역사를 쓰며 그 곳의 자연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금성으로 날아가는 우주선에 몸을 싣고 편안하게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손님 여러분,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울산역, 울산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열차내 안내방송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니 객실 TV에도 안내 자막이 떴다.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
열차가 서서히 역에 정차하고 7호차 플랫폼에서 손을 흔드는 동생의 웃는 모습이 보인다.
정확히 12시 5분이다.
여행가방을 받아 든 동생과 나란히 역을 빠져나가며 나는 순간이동의 무지한 환상에서 깨어났다.

글쓴이

이종철

리아북스 대표시인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