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북스

#23. 이사 전날 밤

작년에 신인상으로 당선되었던 문예지로부터 2023년 봄호에 실을 자유시 2편을 보내달라는 청탁 메일을 받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시집 발행을 위해 준비해 둔 50편 중 ‘이사 전날밤’과 ‘등대섬’을 골랐다.

‘이사 전날밤’은 마지막 이사 전날밤의 풍경과 감회를 아내의 관점에서 썼다. 헤아려 보니 우리 가족은 1981년 결혼 후 무려 열 두번이나 이사를 했었다. 신혼 초 전세집에서 시작하여 처음으로 작지만 소중한 내 집을 장만했다가, 아이들이 자라면서 다시 좀 더 큰 전셋집으로 옮겼다.

그러다가 소위 영끌로 대출을 40%나 받아서 다시 아파트를 구입해서 이사했다. 그 뒤로 지방 근무 발령이 나서 계획에 없던 이사를 두 번 더 했으니, 주민등록등본 전 주소지를 발급해 보면 한 장으로는 모자란다.

좀 더 큰 집으로의 욕심은 나의 직장 정년퇴직과 함께 끝났고, 마지막으로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아파트 평수를 줄여 이사하면서 서울에서 밀려난 느낌을 아내와 나는 감출 수가 없었다. 답답한 서울을 벗어나 남한산성 아래 공기 좋고 산세 좋은 곳에서 살게 되었다고 애써 서로 자위하곤 했다.

다니는 병원도 가깝고 30분 이내 서울에 진입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자리한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마지막 이사하기 전날밤은 아내가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치는 것을 보았다. 괜히 베란다 화초에 물을 주고, 폐기하기로 한 장롱 문짝을 열어 보기도 하며 소파에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이사하여 1년이 지난 지금 아내와 나는 과거에 살았던 어느 곳보다 이곳이 좋다. 어떤 상황이 생겨 또 이사를 하게 될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나머지 생을 끝내도 좋을만큼 정이 들었다.

사람들은 살고 있는 곳은 어디든 정이 든다지만 이 곳은 그것과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시간이 만든 허물들을 벗었다

벌들이 빠져나간 벌집인양
편하고 익숙한 공간만 남는다

딸이 떠나며 남긴 장롱 한 짝
이마에 폐기 딱지를 붙이고 불안한 듯
건너 방에서 기웃거린다

남편의 숨소리가 나른한 소파는
지직거리는 tv앞에서 아직도 의기양양하다
괜히 가만히 누워 본다

힘차게 윙윙거리는 냉장고 안
마지막 남은 생수병 하나가 보챈다
갑자기 목이 마르다

이별은 역할이 없어질 때 한다
창가에서 제철을 잊고 피어난 수국이
꽃잎을 반짝이며 눈을 맞춘다

나도 때 아닌 내일의 공간이동을 생각하며
마시던 생수를 수국 화분에 쏟았다.

시간이 벌써 또다른 허물을 만들고 있다.

글쓴이

이종철

리아북스 대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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