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어기 모퉁이 돌아 실개천 다리 건너면 회색 빛 5층 빌딩 우리집이 보인다.
작은 유리창 몇 개 달린 궁전 같은 우리들 집. 대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수도승들처럼 사는 집.
2박 3일 외출에 풀어진 내 행색.
딸아, 사랑하는 내 막내야. 운전 좀 더 천천히 하자.
너도 집에 돌아갈 때는 눈물 훔치는 거 내 다 안다.
지난 시간은 행복했단다.
아늑한 집에서 니가 해주는 따순 밥 먹고 탕속에 뜨거운 물 받아 쭈구랑 뱃가죽 껄거렁 등가죽 밀어주고 헹궈주고
부드러운 니 손끝이 내 사타구니 닿을 때는 애기처럼 깔깔웃슴 쉰 목에서 터지더라.
포슬한 이부자리 덮고 니 얼굴 마주보며 비누냄새 향기로 내 몸 감아 이리 눕고 돌아 눕고
아침에 새소리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도 그 이불속이 더 좋더라
그 참 이상타, 사진첩에 박힌 얼굴 니 얼굴인지 내 얼굴인지 곱기도 하더구나
니 서방 어릴 때 사진은 어디에서 구했느냐?
– 제 서방이 아니고, 손주 사진이예요. 엄마 증손주
거참 희안터라. 그 애 옆에 처녀는 니 얼굴이 아니더라. 그 처녀는 누구길래 나랑 같이 사진 찍었나?
– 그건 엄마가 아니고 저 하고 제 딸이예요
그 아이 주민번호 두자리 어찌 또 내하고 같으냐,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5층 잿빛 건물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휘청거리는 어머니 팔을 부축하며 걷는다.
건물 앞 은행나무는 올해도 잎이 무성하다. 아마 백년은 훌쩍 넘었지 싶다.
엘리베이트 버튼 누를 때 어머니는 눈을 감으신다.
문이 스르륵 열리면, 다시 생의 한가운데.
<코로나왕국의 왕자와 나푼젤은 마지막에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지요>
나푼젤을 만났다
마법의 머리칼은 잘리운 채
파랗게 실핏줄이 드러난 손마디를
마른 나뭇가지처럼 비틀어 마주잡고
눈만 쾡하니 다시 소녀를 꿈꾸며
왕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로나 왕국의 화려한 불빛
수많은 나푼젤이 헤메는 거리
스스로 왕자가 되고 마녀가 되어
사랑을 얻고 사랑을 훔치다
머리칼을 잘린 채
다시 옥탑에 갇힌다
엘리베이터 앞에 늘어선 행렬
사거리를 지나
건너편 아방궁 불빛까지 이어지고
한 손에는
머리칼을 자른 은빛 나이프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붉은 포도주 잔을 흔든다
식탁아래 길들여진 셰퍼트
피 묻은 주둥이를 쩍쩍거린다
마녀가 된 나는
눈 먼 왕자의 가면을 쓰고
엘리베이트 앞에 서 있다
나푼젤의 마지막 눈물이 필요한 때
* 그림 형제의 동화 라푼젤에서 가시덤불에 찔려 시력을 잃은 왕자의 눈에 나푼젤의 눈물이 떨어져 시력을 회복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동화.『*나푼젤, 그 후 이야기』 - 이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