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북스

#20. 부부

오늘 저녁은 아내와 외식을 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아내가 갈비탕 맛집을 소개받았다며 산책로 반환점 즈음의 하천변에 소재한단다.

언제나 처럼 산책로 입구 고갯마루 위에 서서 둘러보는데 아내가 한마디 한다

‘저 노을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어요’

‘황홀한데. 저 광경을 볼 수 있어 행복해요’

아내가 서쪽 하늘에서 눈길을 돌려 나를 보며 다시 한마디 보탠다.

‘그래요, 당신이 다시 건강해져서 좋아요.’

그리고 다시 서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왠지 쓸쓸해 보이는 아내의 기분과 상관없이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정말 행복하다.

아니 지금 뿐만아니라 적어도 그날 이후부터는 세상의 모든 현상이 새롭고 경이롭다.

3년 전인 2019.12.24일 저녁이다.

“아버님 눈 떠보세요. 아버님 정신이 드세요?”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뜨니 간호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웃으며 눈앞에 있다.

“아버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크리스마스 이브에요. 내일이 성탄절이고요.”

“저는 이제 퇴근해야 해요. 아버님 메리 크리스마스.”

간호사가 웃으며 병실을 나갔다. 정신을 가다듬어 본다.

조각들이 드문드문 맞추어진다.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면 바로 어제 밤 일이다.

저녁 9시 쯤. 병실에서 야간 진료를 위해 진료실로 갔다

아내가 간이 대기실에 휠체어를 세운다. 앞에 벌써 7~8명이 대기중이다. 너무 힘들다.

낮에 수술한 후두가 또 좁아졌나 보다.

이전 병원에서 벌써 3번이나 후두 확장수술을 했었는데 또 좁아지다니 절망이다.

집에서 다니는 병원이 멀어 옮겨온 이 병원도 어쩔 수 없나보다.

지나온 시간들 속 가물 가물한 기억들이 흑백 슬라이드 처럼 돌아간다.

3년 전, 나를 진료했던 의사의 말에 따라 쉽게 후두에 칼을 대었다.

후두에 생긴 희귀암이지만 수술을 하면 한 일주일 입원 후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 일주일은 40일이 넘었다. 수술 후 음식을 삼킬 수가 없어 식사에 문제가 생긴 데다가 폐렴까지 와서 입원이 길어진 것이다.

퇴원후에도 수술 부위가 좁아져 호흡이 힘들고 음식도 여전히 삼킬 수가 없었다.

그 때 마다 병원에 입원해서 확장 수술을 세 차례나 했다.

내가 수술을 하기위해 입원을 하면 아내는 입원실 바닥에 비치된 간이 침대에서 잠을 잤다.

내 목에 수시로 올라오는 이물질을 제거해 주기위해 자리를 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잠이래야 잠깐 눈을 붙이는 새우잠이다. 밤 중에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내가 측은하고 내 자신이 서글퍼진다.

그 뿐인가 가끔 직장다니는 둘째가 교대를 해주어 그 때서야 집에 가서 밀린 청소와 세탁…고양이까지 챙긴 후에 부리나케 씻고 돌아온다.

그런 생활이 3년이다.

아내가 무슨 잘못인가. 병실 바닥에서 새우잠 자는 저 여자가 무슨 잘못인가?

이렇게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병실에서 바라보던 한강 다리가 생각났다. 저기라면 선을 넘을 수가 있겠다.

가끔 힘들 때 마다 엉뚱하게, 때로는 심각하게 생각하곤 했었다

그래, 지금이다. 혼미한 지금 아예 숨을 멈추면 선을 넘을 수 있을거야. 쉬운 방법이네.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목에 힘을 주며 숨을 멈췄다.

마지막 정신이 타다만 나무토막에서 한줄기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썰물에 쓸려 나가는 모래성 같이 병원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캄캄한 암흑속이었던가.

웅웅거리는 말소리. 분주한 발걸음 소리.

누군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는 것 같다.

‘아버님 눈 떠보세요.’ 간호사의 다정한 모습.

아내가 눈이 퉁퉁부은 초췌한 얼굴로 옆에서 바라보고 있다.

간호사가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퇴근하자 아내가 바짝 다가 앉는다

‘당신 수술하고 밤새 중환자실에 있다가 이제 올라왔어요’ 하며 손을 잡는다.

실패한 것인가. 선을 넘지 못했구나.

그리고 두 달 후 의사와 상담하고 기관절제수술을 했다. 삶의 질을 위해 목소리를 잃기로 결정한 것이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나는 마음껏 먹을 수 있고 크게 심호흡도 할 수 있었다. 매일 운동량을 늘려나갔다.

건강은 수술 전 상태로 돌아왔고 삶은 말 그대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에너지로 살아가고 있다.

산책중에 보이는 것 나무와 새, 들리는 물소리까지 새롭고 사랑스럽다.

시도 쓰고 책도 읽고 운동도 하며 보내는 나의 하루는 인생의 화양연화다. 말을 할 수 없으면 어떠냐.

이 나이에는 침묵도 수양이지. 어찌 석양이 황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나간 7년. 다가오는 2월 25일이 되면 정확히 7년이 되는 긴 세월을 아내는 내 인생을 위해 살았다.

밤에 내가 잠을 잘 자는지, 숨은 쉬는 지를 확인하고 잠자리에 들었고 자다가도 깨어나 내 상태를 확인하곤 했었다.

당신의 삶은 포기한 채 고스란히 내 삶만 바라보며 살았다.

 

며칠 후면 아내 생일이다. 주말에 부산에서 첫째가 손주와 올라온단다.

둘째와 합동으로 생일 파티를 계획한 모양이다.

근사한 데서 식사도 하고 비싼 선물도 준비하고 손주들 재롱도 피우고. 고마운 일이다.

이번 생일을 기점으로 나도 변해야겠다. 강제로라도 나로부터 아내를 해방시켜야겠다.

오롯히 자기를 위한 시간을 갖도록 해야겠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냥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아프다고 내색하지 않으니 늘 건강한 줄 알았다.

늘 모든 가정사들을 현명하게 처리하고 빠듯한 생활비로 알뜰히 살림을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늘 마음으로만, 가끔 말로만 고마워했었다.

아내는 어쩌면 그런 나에게 이제나 저제나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을 기대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나는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지만 이제는 해방시켜 주어야겠다.

공원 오솔길 끝자락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
늦가을 호수에
마른 낙엽을 날린다

군데 군데 벗겨진 벤치
편안한 그림자 둘
물위로 흐르는 윤슬 위로
은빛 머릿결이 일렁거린다

기울어진 석양으로
차가워진 그림자 하나가
흰 머리에 붉은 베레모를 씌워주고
다른 그림자는
주름진 목에 붉은 스카프를 둘러준다

서쪽 황혼빛에
귀밑 머리결이 멋있다
턱밑 목선이 곱다
석양을 닮은 단풍잎이
호수에 불꽃으로 일렁인다

글쓴이

이종철

리아북스 대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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