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북스

#18. 선물

지난 연말에 있었던 일이다.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모르는 번호의 문자 메시지 한 통이 왔다.

요즘 흔한 카카오톡이 아닌 채팅 문자 메시지다. 당연히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경계하며 읽는다.

‘이ㅇㅇ님 안녕하세요’, 그리고 1분 후 대화창을 바꾸어서,

‘친애하는 이ㅇㅇ 동지, 퇴직 후 실로 30여년만에 사랑하는 이 동지 이름을 불러봅니다’ 로 시작하는 메시지에는,

자기는 서울 근교에 사는데 속초를 오가며 대관령 감자를 즐겨 사 먹고 있다.

재직 중에 친절하게 도와준 이 동지가 고마워서 대관령 감자 소형 한 박스를 보낸다.

새해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빈다’고 하는 내용이다.

아, 이건 틀림없이 보이스 피싱이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시도 때도 없이 온다는 그 보이스 피싱이 틀림없다.

이럴 땐 그냥 무시하는게 상책이지 하며 그냥 넘겼다.

10분 후 다시 메시지가 왔다. ‘이삼 일내 배송되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문자를 읽은 것이 확인되니까 추가로 또 보낸거야. 이건 틀림없이 보이스 피싱이야’. 그러고는 그냥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틀 후, 정말로 감자 한 박스가 우리 집에 배송되어 왔다!

‘발송인 이ㅇㅇ’

나는 장롱 깊숙히 보관하고 있는 퇴직자 명부를 꺼내 펼쳐 들었다.

‘이ㅇㅇ’. 같은 이름이다. 주소를 확인해보니 메시지와 일치하는 서울 근교로 되어있다.

아, 흘러간 세월에 묻혀 잊고 살았던 30년 전 직장 대선배님이셨다.

그 분이 나에게 선물을 보내신 것이다. 정말 너무나 반가우면서도 부끄러웠다.

내가 험한 세상에 인간성이 메말랐다는 생각과 함께, 나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하여 머리를 흔들었다.

남의 호의를 어떻게 이렇게 매도할 수가 있을까, 나는 바로 답장을 썼다.

'이선배님, 정말 반갑습니다. 선배님 문자 받고 처음에는 누구신가 궁금했는데 택배 발송인 란에서 선배님 존함을 확인하고 너무 반가웠고 고마웠습니다. 먼저 선배님의 소중한 선물 감사부터 드립니다.
어떻게 까마득히 30여년이나 지난 지금 옛 직장후배를 기억하시고 귀한 선물까지 보내셨는지 저에게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선배님, 건강하시죠~?
직장 다니실 때 건강하셨던 모습 상상해보면 여전히 건강하시리라 짐작합니다만, 주기적으로 먼 동해안 속초까지 여행 다니신다니 건강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선배님, 과거 직장에서 업무처리하실 때 선배님의 부하들에 대한 배려와 의견 경청하시던 모습이 존경스러웠고, 그런 점을 본받아 저도 상사로 근무하면서 선배님을 떠 올리며 업무를 처리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배님, 제가 전화를 드리고 싶지만 제가 목수술로 현재 통화가 불가합니다. 해서 자주 문자로나마 안부를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선배님, 항상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종철 배상'

나는 전화번호를 저장해 놓고 즉시 감사 문자를 보냈드렸다. 그 후 이 선배님과의 문자 소통은 계속되고 있다.

아직 적당한 선물을 고르지는 못했지만, 기회를 봐서 나도 소중한 감사의 선물을 보낼 참이다.

선물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받으면 받아서 좋고 주는 사람도 받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정성스레 선물을 준비할 때는 행복감에 젖는다.

뭔가를 얻기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하는 것은 뇌물이 되겠으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만으로 하는 것이 선물이다.

이선배님의 경우는 갑작스런 낯섦으로 시작된 오해가 반가움과 고마움을 넘어 존경으로 이어진 귀한 선물이었다.

눈길을 걷다 보면

걷다 보면,

내리는 눈처럼 가벼워지고

마냥 걷다 보면

몸은 젖은 깃털이 된다

한참을 더 걷다 보면

수증기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지금 앞서 가는 너는

누구냐!

하얀 눈 위에

어지러이 발자국만 찍었던 너,

어제의 내가 아니다.

글쓴이

이종철

리아북스 대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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