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한 살 더 먹어 슬프다는 남편에게 ‘올해는 2살 더 어려지면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위로했지만,
태어난 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며 여전히 울상이다.
반대로 초등학생인 조카는 원래대로라면 10대가 되었어야 하는데 다시 8살이 되었다며 슬퍼했다고 한다.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12월 31일과 1월 1일 그 하루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생각한다.
끝내고 다시 시작해서, 바꾸고 싶은건 달력이 아니라 나 자신인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매일을 새 날처럼 맞이해야지.
아침마다 처음 보는 세상인 듯 “햇님 안녕? 나무 안녕? 501동 안녕?”하는 리아처럼.
몇 년 전, 나는 신생아 시절의 리아가 손을 발견한 순간을 목격했다.
리아는 자기 입에서 꺼낸 자기 주먹을 경탄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대체 이 맛있는 것은 무엇이고, 어쩜 이렇게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인지 연구하는 듯이
한참동안 주먹에 힘을 줬다 뺐다 하고 있었다.
아기가 몸을 탐구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새삼 생명의 힘을 느꼈다.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 심장이 뛰고, 호흡하고, 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
많은 책에서 말하는 ‘있음 그 자체’, ‘현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꼈던 순간이다.
아기는 태어나서 먼저 몸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그 다음으로 점차 말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몸과 말과 마음은 모두 도구일 뿐이지만, 그 도구를 통해 자아를 갖추어가고
어느 순간에는 자아 속에 마음을 가두어 스스로 한계선을 그어버린다.
나는 데미안을 수 없이 읽었지만 이제서야 알을 깨고 나오는 새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자아를 만드는 것이 인간의 첫번째 숙제였다면, 그 자아를 깨는 것은 인생 전반에 걸친 과제였다.
모두가 무언가 경험하기 위해 제각각의 형상을 갖추어 지구에 왔다.
그러니 삶의 목적은 태어났을 때 이미 달성된 것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든, 가장 좋은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
아마도 매 순간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이 좋은 삶일 것이다.
내 몸으로 하여금 ‘숨 쉬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고, 생각이 나의 것임을 ‘알게 하고’,
나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의 의지가 없으면 몸도, 생각도, 기분도 그 어떤 나의 것도 나로서 통합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평상시에는 인식할 수 없다가
사랑-기쁨, 즐거움, 감사함을 모두 포용하는-의 감정을 느낄 때,
또는 반대로 너무나 큰 좌절을 겪을 때에 불쑥 찾아오곤 한다.
나는 이걸 가지지 못해서 저걸 해야한다는 환상에 끊임없이 시달리다가도,
그 순간에는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물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시간이 없다’는 환상으로 돌아가곤 하지만,
그래도 아이를 키우면서는 삶에 대한 감사함을 훨씬 더 자주 느끼고 있으니 그 또한 감사한 일이다.
눈 큰 사슴은 추운 날이면 난로의 온기를 찾아 내려왔다가 다시 깊은 산 속으로 고고히 사라지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영영 가버린 것은 아니다.
눈 내리는 날이면 가는 길마다 사슴 발자국이 찍힐 것이다.
아니면 그 사슴은 오히려 내가 걱정되어 내려와 본 것은 아닐까.
이 겨울을 지낼만큼 난로가 따뜻한지, 땔 것이 충분한지 확인하고서는
자기도 겨울을 나러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내려간 건 아닐까.
바람이 누그러지고 나무에 새순이 돋아날 때쯤 돌아올 것이다. 새로 돋아난 멋진 뿔을 달고.
너는 남쪽 나라로 간 것이 아니었냐고 물으면, 큰 눈을 껌뻑이며 줄곧 여기 있었다고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