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북스

#16. 망우초-원추리꽃

1월 15일. 아직 겨울이 한창인데 간밤에 큰 비가 왔다.

낮 기온이 영상 10도를 넘나들며 이번 주말까지 봄 기운이 계속될 거라는 일기예보다.

아무리 기후 변화가 심해도 벌써 봄이면 안 되지!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

산책길을 나서려고 창 밖을 내다보니 어제 밤에 내린 비 때문인지 안개가 자욱하다.

간간이 비소식이 있을 거라는 일기예보를 떠올리며 방수용 후드 점퍼를 찾아서 꺼내 입었다.

겨울 방한용으로는 다소 얇은 봄 등산용이지만 10도의 기온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문 밖을 나서니 안개비가 포슬포슬 내리고 있다. 왠지 기분이 좋다.

눈이 오는 날을 좋아하지만 비가 오는 날도 좋다.

눈이 오면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신비감에 막연한 희망을 갖게 되고,

비가 오는 날은 우산을 받쳐 들고 집을 나설 때 누군가를 마중 나가는 것 같아 괜히 설렌다.

창곡천 공원 입구 고갯마루에서 시작되는 산책로는 저 아래 카페거리까지 이어지는 곧은 직선 소방도로다.

나는 산책길에 나서면 언제나 이곳 고갯마루에서 잠시 내려다보는 습관이 있다.

아래로 길게 뻗어 내린 도로의 원근감에 편안한 눈으로 길옆의 공원을 좌우로 쭉 둘러보기도 하고

공원 너머로 보이는 눈 아래 아파트단지와 더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청계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경치를 잠시 즐긴다.

특히 여름철 저녁에 바라보는 붉은 석양은 그 색채의 황홀함에 넋을 잃는다.

그때마다 스마트폰을 누르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장면은 한 컷도 따지 못했다.

안개비로 공원 너머 아파트 꼭대기만 희미하게 보이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길옆 좌측 공원 잔디밭이 황금빛이다. 간밤의 큰 비에 추위에 바스라졌던 잔디 끝이 쓸려 나가고, 지난 가을에 물든 황금빛 줄기가 드러났다.

안개비가 내려도 한낮의 잔광에 색채가 뚜렷히 보인다. 그 동안 먼지에 파묻혀 숨겨졌던 자연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잔디 사이에 드문 드문 이름 모를 푸른 풀과 토끼풀이 섞여 있다. 산수유 나무에 매달린 열매는 이슬로 씻은 듯 말끔해진 얼굴로 붉은 보석처럼 빛나고, 거미줄처럼 가는 단풍나무 가지에는 이슬이 맺혀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린 전구처럼 반짝인다. 수양버들은 젖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조신하게 서 있다.

창곡천은 겨울동안 건천이지만 오늘은 물이 제법 졸졸 흐른다.

한 겨울의 흙먼지를 씻은 물이 아래 탄천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 들어 바다로 가는 과정이다.

하천을 따라 카페거리를 지나 산책로 반환점에 다다르면 작은 호수처럼 제법 넓은 저류지가 있다.

엊그제 산책 때는 지난 여름에 홍수에 밀려 내려온 토사 정비 작업을 하느라 인부들이 물을 퍼내고 중장비로 바닥을 긁어내고 있었다.

바닥이 드러나며 생긴 작은 도랑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첨벙거리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녀석들을 그물로 잡아 다시 물을 채울 때 풀어주면 좋을 텐데, 미꾸라지는 진흙속에 머리를 묻고 잘 피하고 있을테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지나쳤지만, 오늘 보니 저류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이 고여 있다.

인간이 힘을 가하지 않으면 자연은 늘 스스로를 치유하며 적응하고 진화한다.

지난 여름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운 야생 원추리 꽃을 즐겼다.

등산길에서 만나는 원추리꽃의 매력에 빠져 가을에 씨앗이 여물때를 기다려 몇 알을 집으로 가져왔다.

상추를 심어 따 먹은 화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심고는 잊고 있었는데, 봄이 되니 그 자리에서 파란 싹이 뾰족하게 돋아났다.

그 싹을 아내와 나는 물을 주고 비료를 주며 정성을 다해 키웠다.

여름 개화기가 되자 야생 원추리꽃이 베란다에서 고개를 길게 빼고 아파트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태를 뽐내었다.

원추리꽃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 혼자 즐기려고 자연을 변형시켰다는 생각이 들어 어쩐지 마음 한 켠이 씁쓸했다.

그 때의 기분을 담은 시가 ‘망우초-원추리꽃’ 이다.

원래 살던 곳은 개울가 둔덕 아래
흐르는 달빛보다 잰 걸음으로
도굴꾼의 전리품처럼
외눈박이 욕망이 아파트 베란다로 데려온다

자동 조절되는 에어컨이 돌 때 마다
일렁이는 솔바람이 그립다
종일 가습기가 분무하는데도
개울위로 흐르는 안개 소리가 그립다
어둔 밤 바깥이 궁금하여
몰래 길게 목을 빼고
15층 아래 고도를 가늠해 본다
아침이면 여지없이 굽어진 목덜미에
죄수처럼 쇠꼬챙이가 묶인다
인산 비율 높인 화학비료 한 삽
씨방을 튼튼히 한다나
건강한 뿌리를 위한 칼륨은
수돗물 세 컵 속에 충분히 녹아 있다나
원래 피부는 햇볕에 어울리는 황색
노란 물감으로 염색하더니
아예 흰색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는 드디어
마시던 검은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소파에 앉아 하얀 이를 드러내고
허공을 보며 허옇게 웃는다
그립구나
흐드러지게 웃는 풀꽃들아, 차라리
내 꽃잎 들추며 달라붙던
왕 진드기들아

* 망우초는 근심 걱정을 잊게 한다는 원추리꽃을 말하며 원래 야생종으로 진드기가 잘 꼬여든다

글쓴이

이종철

리아북스 대표시인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