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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눈 내리는 밤

기다리던 문예지가 왔다.

지난 9월에 한국 시학으로부터 원고 청탁이 있어 고민하다 10월 중순이 되어서야 시 2편을 보냈다.

그 시가 이번 겨울호에 실린다고 했다.

우체국용 대봉투를 급히 뜯었다.

책 표지에 존경하는 명사 시인들의 사진과 이름이 실려 있고,

내 이름도 그 옆에 나란히 새겨져 있다.

‘눈 내리는 밤’ 과 ‘불청객’ 이라는 내 작품 2편이 활자화 되어 있다.

내 작품을 읽어 내려 가며 시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졌다.

내가 객관화된 독자의 입장에서 타인의 작품을 읽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설레고 기뻤다.

‘눈 내리는 밤’은 어린시절 산골의 정경을 상상하며 잃어버린 대상을 그리워하는 작품이다.

간절한 그리움의 대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것은 잊지 못할 첫사랑일 수도 있고

멀리 떨어진 친구일 수도 있고

돌아가신 부모님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시에서 내 몸을 떠난 목소리를 그리워하며 쓴 작품이다.

목소리를 눈이 큰 사슴으로 물체화 하여 표현했다.

목구멍을 떠난 소리를 어떻게 하면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썼다.

현대 의학에서 나처럼 기관절제수술로 목소리를 잃은 사람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은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식도 발성법으로 식도에 공기를 넣어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는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의 소리가 난다.

그런데 그 훈련 과정이 여간 어렵지 않고 성공 가능성도 확실치 않다.

국내 대학병원 몇 곳에서 실시하던 치료과정이 유명무실 해진 것도 이 때문이리라.

두 번째 방법은 목에 증폭기를 대고 식도의 울림을 증폭시켜서 소리로 바꾸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몇 번만 해보면 금방 소리를 낼 수 있다.

나도 프로복스라는 이기계를 사서 몇 번 쓰다가 방치하고 있다.

기계음의 소리가 꼭 AI가 말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윙윙거리는 잡음이 너무 심해서 거북했다.

마지막 방법은 식도에 구멍을 내어 프로복스 장치를 목에 직접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는 말을 할 때마다 기계를 목에 대는 불편함이 없어 외형상으로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기계에 끼는 음식물 찌꺼기를 소재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나는 수술 당시 이 방법은 배제했다.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것도 번거롭지만

무엇보다도 식사를 잘 하기 위해 목소리를 포기하는 수술인데

그 소중한 식도 마저 또 수술로 구멍을 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수술 후의 예후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나는 식도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아내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잘 되지도 않는 첫번째 방법으로 지금까지 여전히 노력중이다.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이.

오늘도 산책길에서 정시나간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려 본다.

‘ㄱ, ㄲ’ 발음이 가장 잘 된다.

​‘강가에서, 고기, 감기’ 등과 같이 목구멍 식도 끝에서 꺾이는 단어는 발음하기가 쉽다.

‘ㄷ, ㅂ, ㅎ’ 발음은 아예 불가능 하다.

​‘바라보다, 하다, 되바라지다’ 등의 발음이 그것이다.

ㅊ,ㅍ’과 같이 혀나 입술의 마찰로 만드는 소리는 조금 쉽다.

​‘창포, 초록, 파란’등이 그렇다.

오늘도 나는 오솔길 같은 내 목구멍에서 떠나간 눈 큰 사슴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불을 지핀다.

다시 찾아올 사슴이 춥지 않도록.

눈 내리는 밤에는
산기슭에 하얀 길을 내며
눈 큰 사슴이 찾아온다
천지에 눈이 많이 와서 길을 잃었다고
잠시 언 발을 녹이고 싶다고
내가 지핀 난로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것 같다고
눈 큰 사슴이 찾아온다

푸른 숲으로 사라진 당신은 끝내 오지 않고
눈은 고요히 내리고
나는 이불 밑을 따뜻하게 데운다
숲으로 난 길에
다시 눈이 내리고
당신의 온기는 아직 따습고

눈 내리는 밤은
눈처럼 새벽이 온다
눈을 뜨지 않아도 새벽이 하얗게 온다
눈 큰 사슴은
눈밭으로 난 하얀 길을 지우며
왔던 길을 따라 숲으로 사라진다

다시 차가워진 난로에 불을 지핀다
언젠가 찾아올 눈 큰 사슴

글쓴이

이종철

리아북스 대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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